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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22. 22世 〉51. <부정공>효자휘준섭행장(孝子諱俊燮行狀)
1. 문헌 목록 〉22. 22世 〉53. <부정공>묵헌공휘인섭묘갈명(黙軒公諱仁燮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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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부정공>석초처사휘원식묘갈명(石蕉處士諱遠植墓碣銘)
石蕉處士諱遠植墓碣銘 族叔光鉉氏南中善士也年今八旬有六慕先一念如水滔滔使其姪尚勲走龍城寓舍託以先狀之役顧余不侫安敢當也然長者之命何忍辭謹按公諱遠植字致道石蕉其號也趙氏源委甚長肇於高麗門下侍中諱璋自是而冠冕不絶有若農隱虔谷兩先生之貞忠大節相好梅窓公之篤倫好學及其曾孫遵晦翁之繼起焉則實爲東方巨族者久矣於公爲九世以上也曾祖諱在攝祖諱喜錫考諱泳學號溪源有志行見邑誌妣驪興閔氏通德郎馨周女有婦德公資禀端雅志氣高潔七歲始學于九曲公不煩程督而能通大義九曲翁賛曰吾門昌大惟在汝及長師事淵齋宋先生難疑答問每加稱賞賜號一樂而記亦隨焉其見重如此故聲譽蔚然遊塲屋數年不得於有司者盖不汲汲於名利而雅意所存自在耳及歛然退避不作成市一歩地治家有度事親極志體之養兄弟盡友于之道奉祭致如在之誠居憂備易戚之禮敎子姪以義御奴僕以恩此其治行大畧也事載邑誌 高宗庚子六月二十六日卒距其生 哲宗庚申閏三月五日享四十一春秋墓雙岩白也山負巽原配長興任氏在純女與公同年三月三十日生後公三十八年丁丑十一月一日卒墓合塋有女士風配德無違夫病斫指注血延命及喪矢以下從不八水醬家人驚惶泣諭萬端乃幡然改悟曰若遂吾願則上奉下率誰任其責歛襲送終一無遺憾自是以後耘耔紡績夜以繼日克保門戶宗族鄉隣莫不稱頌有六男二女光準光鉉光烈光震光宣光順光李鍾采李允燮妻孫曾内外摠四十餘人多不盡記噫傳曰其儀不忒其爲父子兄弟足法而後民法之也今讀此狀正家之道制行之高可謂無愧于古之君子年命局之未展素蘊固爲識者慨然多子多孫克承其武不墮家聲則其不食之報豈非在斯也歟吁盛矣遂爲之銘曰 峰高天皇江深九曲玉川名門忠孝家法我有師友淵翁是學白也之阡封崇四尺我昭其銘以詔來百 族後孫 東勲 謹撰 석초처사휘원식묘갈명(石蕉處士諱遠植墓碣銘) 족숙 광현(光鉉)은 남주의 착한 선비로 연세가 이제 八十六세인데 선영을 사모한 마음이 왕성하여 그 조카 상훈(尚勲)을 龍城 寓舍로 보내 선장을 요청하니, 돌아보건대 불초가 어찌 감히 차마 사절하겠는가. 상고하건대 공의 휘는 원식이요, 자는 치도(致道)며, 호는 석초(石蕉)인데 고려 문하시중 휘 장(璋)을 상조로 관면이 끊어지지 아니하여 농은 건곡 양선생의 정충 대절과 상호 매장 두 공은 천륜에 독실하고 학문을 좋아 하였으며, 그 증손 준회옹이 이어 일어났으니 진실로 동방에 거족이 된 지가 오래이니 이상이 공의 세(九世) 이상이다. 증조의 휘는 재섭(在攝), 조의 휘는 희석(喜錫)이요, 고의 휘는 영학(泳學), 호는 계원(溪源)인데 지행이 있어 읍지에 나타났고 비 여흥(驪興) 민씨(閔氏)는 통덕랑(通德郞) 형주(馨周)의 따님으로 부덕이 있었다. 공이 자품이 단아하고 지기가 고결하여 七세에 처음으로 구곡공(九曲公)에게 수하하였는데 자주 정독하지 아니하여도 능히 대의를 통달하니 구곡옹이 칭찬하되, 「우리 집을 창성할 자는 오직이 아이다」하였다. 장성하매 연재(淵齋) 송선생을 스승으로 섬겨 어렵고 의심난 데를 문답할 때에 매양 칭상을 더하고 일락(一樂)이라 사호하며 號記를 지어 주시었다. 그 장함이 이와 같아 아름다운 명성이 울연하였고 과장에 응시한 지 수 년에 유사와 상치한 것은 대개 명이에 급급하지 않고 바른 뜻이 있는 때문이었다. 이에 자취를 감추고 城市에 나가지 아니하며 집을 법도 있게 다스리고 어버이를 섬기며 뜻과 몸을 다 봉양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며 제사때에는 계신 것 같이 정성을 다하였고 상사에는 다스리고 슬퍼한 예를 갖추며 자질을 의리로써 가르치고 종을 은혜로써 거느리니 이것이 그 사행의 대략이요 읍지에 등재되었다. 철종(哲宗) 경신년(庚申年一八六○) 윤 三월 五일에 출생하여 고종(高宗) 경자년(庚子年一九○○) 六월 二十六일에 향년 四十一세로 별세하니 묘소는 雙岩 白也山 巽坐原이다. 부인 장흥 임씨(長興任氏)는 재순(在純)의 따님으로 공과 같은 해 三월 三十일에 출생하여 공보다 三十八년 뒤인 정축년(丁丑年一九三七) 十一월一일에 별세하니 묘소는 합영이고 女士의 풍도가 있어 부덕이 어김이 없었으며 지아비의 병에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드리어 연명하였고 운명함에 따라 죽기로 맹세하고 음식을 먹지 아니하니 집사람이 경겁하여 갖가지로 개유하니 이에 마음을 돌이켜 깨닫고 말하되, 「만일 나의 소원대로 하면 부모 봉양과 자녀 교육을 누가 책임질 것인가」하고는 염습과 장례를 유감 없이 치상하고 이후로부터 농사 및 길쌈일을 쉴 사이 없이하여 능히 문호를 지키니 종족과 고을 사람이 칭찬을 아니한 자가 없었다. 아들은 광준(光準), 광현(光鉉), 광열(光烈), 광진(光震), 광선(光宣), 광순(光順)이요, 딸은 이종채(李鍾采), 이윤섭(李允燮)의 처며, 내외 손자 증손이 四十여 인이므로 다 기록하지 못한다. 아, 傳에 말하기를, 「그 법도가 틀리지 아니하고 그 부자 형제가 족히 법한 뒤에 백성이 법한다」하였으니, 이제 이 장문을 읽어보매 집을 바르게 한 도리와 행실의 높이가 가히 옛적 군자에 부끄러움이 없다 하겠다. 수명이 부족하여 본시 쌓은 포부를 펴지 못하였으니 진실로 아는 자의 개탄할 바로다. 많은 자손이 능히 그 선덕을 이어 집안의 성망을 떨어뜨리지 아니하였으니 그 갈지 아니한 보시가 어찌 이에 있지 않겠는가. 감탄하고 성대하도다. 다음과 같이 銘한다. 천황봉이 높고 峰高天皇 구곡강이 깊으다 江深九曲 옥천 명문에 玉川名門 충효 가법이로다 忠孝家法 내가 사우를 두어 我有師友 연옹에게 이를 배웠네 淵翁是學 백야의 묘도에 白也之阡 四척 봉분이 높으니 封崇四尺 내가 그 명을 밝게하여 我昭其銘 내후 백세를 가르치노라 以詔來百 족후손(族后孫) 동훈(東勲) 삼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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